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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연극

연극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극단 '오늘도 봄'

by 그리고아무말없었다 2023. 8. 1.

 

<극단에서 제공한 요약>

전업 작가인 '지수'는 소외된 존재들의 고통을 진정성 있게 그려 세상에 빛과 희망이 되는 작품을 완성하려 애쓰지만, 정작 그녀의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소외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인 방임아동, 자립준비청년, 길고양이가 냉혹한 세계와 마주한 어려움을 이겨 내고
희망찬 미래를 그려내는 동안, 그녀의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은 차가운 현실을 견뎌내지 못하고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연극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작가의 자의식이 상당히 강하다'라는 인상이었다.
여러 가지 소외계층들의 불행이 나열되고, 모두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 사건들과 사람들을 묶는 존재가 '작가'이다.
물론 그 자체의 구성에는 큰 문제가 없다. 모름지기 '작가'라는 존재는, 미시적인 것들을 조명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걸 테니. 그런데 그렇게 '작가'로 엮여서 얘기되는 극의 사회적 시선은 영 괴상한 점이 있다.

 

비극 1.


승완과 경태는 20대의 우애좋은 형제이다. 우리가 흔하게 그리는 건실한 청년들이랄 수 있겠다. 
이들은 부모의 어떤 지원도 없이 자립해서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현재의 고난을 감내하며 버텨내고 있다고  할수도 있다. 그런데 공장에서 일하던 형 승완이 산재를 겪고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회사는 책임을 회피할 뿐이다. 모든 상황에 좌절한 동생 경태도 집에서 목을 매고 죽는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던 형제의 집. 수일이 지나고서야 우연히 경태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비극 2.


어린 자매 우림과 우리는 돈을 버느라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엄마도 없다. 그럼에도 서로를 아끼며 참 해맑게 산다. 사정을 눈치챈 이웃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긴하나 직접적인 개입은 없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자매는 집에서 굶어 죽는다. 


비극 3.


그 동네를 배회하는 고양이 가족이 있다. 구체적으로 몇 마리인지 드러나지 않지만 최소 2마리 이상으로 보인다. 이들을 챙겨주는 이들은 많다. 특히 작가 지수는 캣맘을 자처하며 먹이를 매일 챙긴다.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웃도 있다. 그들 사이에 작은 잡음들이 있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양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곧이어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고양이 학대 영상을 만들어 팔기 위해 누군가가 고문을 하고 죽인 흔적이었다. 

 

모두 우리 주변에서 있음직한, 한 번쯤 들어봄직한 사건들이다. 모든 사건이 다 죽음으로 향하고, 이렇게 짧은 시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구역에서 죄다 죽어버리는 과정은 당황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전개를 취하고 있든, 어쨌든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개별 사건들이라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이 각자의 사회 사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다.
죽은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모두 어려운 삶에서 아등바등하던 존재들이라는 것이고, 튼튼한 삶의 버팀목을 누리지 못한 존재라는 점이다.  사회적 관심안전망의 부재.
그러니까 이 극이 이들 이웃의 불행을 조명하며, 말하고자 하는  '화두'는 그런 종류라고 '예상'이 된다.


이 극은 그 사회적 빈틈을 매개하는 존재로 '작가'를 이용하고 있고, 그 구조를 강조하기 위해 액자형태를 취하고 있다.
연극의 시작, 1억 공모의 큰 상을 받은 작가 지수는 대담자리에 초청되어, 예상치 못한 수상 소식에 놀랐고, 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 인터뷰한다.
그리고 실제 극이 시작되면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가서, 무명소설가로서 앞날이 어두운 그녀의 삶과, 그녀만큼이나 어렵고 불투명한 삶을 사는 이웃의 여러 모습들이 열거된다. 그 모습들이 바로 비극 1,2,3의 내용들이다.
그녀는 이웃들과 매일 마주하고, 인사하고, 서로 한없이 살갑게 굴지만, 각자의 깊은 삶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서로를 구원할 수 없어서 모두 비극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들의 삶이 그녀의 작품 소재로 빛날수는 있었다.
극의 말미. 그녀의 인터뷰가 마무리된다. 그녀는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그늘 속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 지수는 조금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웃의 죽음 앞에서도 불필요한 무심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한다. 그녀가 정말 교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극에서 선문답하는 고양이의 형상으로만 그려진다. 말미의 인터뷰는, 그런 그녀의 무감각과 사회적 무심함, 나아가 이중적 태도를 꼬집기 위해 구성된 액자 양식이다.

자, 이 극의 흐름을 쭉 보고 나서 관객이 느껴야 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단지 이웃의 불행을 소재로만 활용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동정도 없는 그녀의 얄팍한 심성을 비판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저런 작가의 행태에 우리들 모두가 품고 있는 '내면적 무심함'을 치환해 보면 되는 걸까?
그게 무엇이든, 이 사회적 화두를 품기에 아귀가 아주 딱 맞지가 않아 보인다.

'작가'라는 입장은 이야기의 원형 상, '좌절'과 '한계'에 직면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첨예한 사회문제에 부딪치고, 사회적  부조리에 유난히 예민하지만, 그런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갖진 못한다. 그들의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그들은 문제적 삶에 끊임없이 노출되지만, 해결은 어렵고, 요원하다는 결론에 봉착하곤 한다. 그들의 역할은 '사회적 환기'에 머물고, 그 조차 대부분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도 작가 지수가 더 '공감능력'이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한들, 좀 더 주변에 관심을 집중했다 한들 달라질 게 없어 보인다.
경태 형제의 비극, 우리 자매의 비극, 길고양이들의 수난은 거시적인 사회구조의 문제이고, 지수가 동생 경태를 위로해 준다 한들, 자매에게 밥 한 끼를 더 제공한다 한들, 길고양이를 집으로 거둔다 한들, 변화는 눈앞에 있는 그들 각자의 불행이 유예되는 것뿐이다. 이런 사회 구조 문제들은 개인의 '선행' 하나로 해결될 선상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태도와 심성이 어떤 상태인지간에 이 이야기는 결국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구조이다.
즉, 이 이야기에서 지수의 '공감능력'을 조롱해봐야 거시적인 시점에서 의미창출이 안된다. 엄밀히 말해, 그녀도 어쩌다 공모에 당선되며, 이제 겨우 삶이 핀 사회 소시민일 뿐이고, 이 모든 사태에서 그녀가 야기했거나 직접적인 사건으로 연류된 관계는 부재하다.  

왜 작가는, 거시적인 사회 문제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그것들을  '작가 지수라는 개인의 무관심'으로 엮었을까? 심지어 왜  그녀의 행태를 조롱하는 이야기 구조를 취하게 된 것일까? 
난 여기서 조금 이상한 위화감을 느낀다. 난 이게 '작가 자신의 자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작가로서 더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호기로움, 자성적 반성이 자기 비하로 연결되는 작가적 과대망상.
우리주변에서 실제 벌어지는 사회사건들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사건에 직접 연류되지 않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책무만 주어진 이 '작가'라는 인물은 보다 더 관찰자로만 남아 현상의 의미를 분명히 담았어야 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자의식'이 기여이 그녀를 중심으로 내세우는걸 모자라 현상을 개인의 책무로 한정해버리는 이 상황, 그 이질감을 작가라는 존재의 비판으로 희석하며 본질을 흐리는 이 과정은 여러모로 괴상하다. 

비극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작가 지수'의 무관심과 대비되는 역할로만 휘발되는 점에서 불행이 '전시'되고 있다는 인상이 들고, 하나하나 다루기도 거대한 사회적 담론들이 '사례로' 서둘러 나열되고, 한꺼번에 묶여 처리되는 손쉬움. 그 목적이 '비극'을 일으키기는데 한정된다는 점에서 삶의 불행이 너무 기능적으로 쓰인다는 사실도 걸린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인간의 불행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삶의 한계가 그다지 정서적인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이 울부짖으며 '사회적으로 이런 제도와 문제가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어요!'라고 또박또박 설명하는 과정들에서 나는 더욱 극의 상황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극을 연출한 채수욱 연출가는 작품의 핵심을 이렇게 말했다.
"소외된 자들의 고통과 세계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것" , "타인의 고통을 쉽게 대상화하고 관음 하는 우리의 모습",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당연시되는 세계"
어쩌면 이 극에는 그 요소들이 다 들어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요소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결합되면서, 결과적으로 극 자체가 비판하고자하는 대상 자체가 되는 자가당착.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를 대상화하고 관음하는'형태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