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시

[시] 선택의 가능성

by 그리고아무말없었다 2021. 4. 13.

선택의 가능성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Wassily Wassilyevich Kandinsky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 러시아의 추상예술 창시자 (이하 그림 동일)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 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녀가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을 당시 했던 연설문이 명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 시인과 세계  -1996년 12월 2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연설에서는 늘 첫 마디가 제일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미 첫 마디는 이렇게 지나갔군요. 하지만 다음

blog.daum.net

많은 화두들 중, 그녀가 영감의 원천이며, 자질의 시작이며, 근원적인 질문의 시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이야기하는 부분이 아름답다. 그 시작은 자신에 관해 골몰하는 것이며, 그리고 끊임없이 나는 무엇이든 모른다는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은 따로 있었던 것이죠. 혼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가면, 장신구들을 모두 벗어던진 채 고요한 침묵에 잠겨 아직 채 매워지지 않은 종이를 앞에 놓고, 조용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그런 순간 말입니다.

영감!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감이 솟아난다는 사실입니다.

-  1996년 12월 27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상식에서, 비브와바 쉼보르스카

나는 여전히 나를 잘 모르지만, 점점 내 취향에 대해서는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그게 무엇인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다. 그건 나를 더 나다운 존재로 만들고, 남들과 다른 것에 기쁨을 주었고, 너와 비슷했다는 발견에  안도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예외적인 것들, 더 작은 것들, 더 가려진 것들에 끌리게 되는 어떤 본질들.

취향과 성향의 미묘함을 통해 나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듯한 이런 시나 노래들은 다 좋았다. 그들이 드러내는 그 지향점이, 은연중에 느껴지는 그 자부심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 그 머나먼, 진은영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새 인간  (0) 2021.04.04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わたしが一番きれいだったとき  (0) 2021.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