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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영화] 잊혀진 사람들The Young And The Damned, Los Olvidados (1950)

by 그리고아무말없었다 2021. 3. 28.

장   르 : 드라마, 범죄

국   가 : 멕시코

제작비 : 45,000$

감   독 : 루이스 부뉴엘 Luis Bunuel

배   우 : 알폰소 메히아(페드로), 로베르토 코보(자이보), 에스텔라 인다(페드로 엄마)

링   크 : https://movie.daum.net/moviedb/crew?movieId=23870


 

내게 브뉴엘은 동경의 목록 어딘가에 슬쩍 기록된 감독이었다. 아는 건 없지만 몇 가지 흔적만으로 내게 영감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었다. 

난 브뉴엘을 그의 진짜 영화들보다 글로 기억한다. <잔혹 영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앙드레바쟁의 짦은 평론 모음집이 있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아버지였던 그의 평론들 중 몇몇 잔혹영화(The Cinema of Cruelty) 계열 감독들의 글만 추려서 출판한 핸드북이었다. 사실 그 책은 히치콕에 대한 비판이 보고 싶어서 구입 했던건데 (바쟁은 히치콕을 믿지 않았다), 정작 인상적이었던 건 제대로 본 적도 없던 브뉘엘에 관한 멋진 글들이었다. 

바쟁의 애정과 존경 가득한 펜심으로 꼼꼼히 써내려간 글.

 


부뉴엘의 초현실주의는 스페인의 모든 전통들과 결부되어 있다. 공포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취향잔혹함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인생의 극단적 측면을 추구하는 태도 등은 고야와 수르바란리베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이며이들 화가들이 인간의 타락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할 때 드러나는 인간성에 관한 비극적 감정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잔혹성 또한 인류와 그림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를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루이스 부뉴엘 등 <잔혹한 영화>의 가치" , 앙드레 바쟁

 

영화는 잘 몰랐지만, 영화로 '사회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작가적 자부심이 좋았다. 삶과 꿈, 환상에 특별히 경계를 삼지 않는 그의 이상향이 좋았다. 바쟁의 매력적인 글로 서술된 모호함들, 특이한 제목들로 각인되는 그 시적인 창작 관점들이 좋았다. 스페인에서 맥시코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떠도는 인생의 역곡과 말년까지 제작이 지속된 열정이 좋았다. 그렇게 부뉘엘은 내 영화 사전에, 단 한편의 영화도 없이 위대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누구나 한번쯤 알음알음 보게되는 <안달루시아의 개>와 “바쟁의 글”로 내게 각인된 브뉘엘은, 막연히 영화감독보다는 필름을 캠버스로 이용하는 전위적인 미술가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아니 그의 영화는 그런 종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잃어버린 사람들>을 통해 그 세계의 일부를 훔쳐보니, 그는 좀 더 현실 투쟁적이고, 계산이 많은 감독처럼 느껴진다.

 

<잊혀진 사람들>은 20세기 중반의 어느 빈민가에 살던 아이들을 다루는 영화이다. 마침 작년에 데이비드 린의 48년작 올리버트위스트를 보았는데, 묘하게 그 영화도 떠올랐다. 19세기 디킨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데이비드의 영화를 이 영화와 비교하는 건 좀 부당하고 부적절한 면이 있겠지만, 그렇게 둘을 가져다 대면 <잊혀진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더 쉬운 측면이 있었다. 

데이비드의 <올리버트위스트>는 지금봐도 근사한 회화적 이미지들로 감흥을 남기는 영화다. 그림을 짜는데 천부적인 린의 재능이 컷 하나 하나에 힘있게 담겨진 영화였다. 그 비극적인 산업시대 영국 뒷골목을 둘러보는데도, 영화의 주요 단상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는 게 그 영화의 한계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갖은 회화 기법이 다 동원 된 것 같은 그림스러움의 연속. 명작영화 DVD세트에 들어가 있으면 아저씨들 든든해 함] 

 

반면, <잊혀진 사람들>은 이미지로도 “아름다움”과는 제법 멀고, 내용으로봐도 '흥미진진한 굴곡들을 겪고 쾌감어린 시련의 극복'으로 도달하는 클래식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이 영화가 데이비드의 영화에 비해 휠씬 재밌었는데, 그건 오랜 빈민굴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지금의 나와도 맞닿는 흥미있는 접점들을 보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의 인물들도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치 않다. 

아이들은 분명 가난으로 버림 받은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약자들이다. 그러나 영화 상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모든 행위들은 범죄로 이어진다. 다루기 쉬운 장애인들을 괴롭혀서 돈을 뺏는 일 따윈 일상이고, 가장 흉폭한 아이를 중심으로 이미 조직화가 되어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아이들은 어리고, 사회와 가정의 방치로 그리 되었을, 보듬어 안아주어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앙드레 바쟁이 이 ‘아이들’에 관해 남긴 멋진 표현을 빌려보면,


어린아이들은 아름답다. 그들이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다.
죄가 있어도 혹은 죽음에 처해 있어도 이들이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인들이 더 악한 이유는 불행이 그들을 돌이킬 수 없이 결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아이들" , 앙드레 바쟁

[어린 게 벼슬. 늙을수록 더 느낀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동정을 부추기기는 커녕, 아이들의 입장에 서는 일 조차 혼란스럽게 만든다.

장님에게 불쾌한 말을 들은 여자아이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 장님을 찔러버릴지 고민한다. 그걸 지켜보던 장님의 수족이었던 다른 남자아이는 조용히 비수를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여자아이에게 그 남자를 어서 푹푹 찌르라고 부추긴다. 이 남자아이는 평소에도 힘들어질때면, 보지 못하는 늙은 장님 앞에서 큰 돌을 들고 매번 내리 찍어버릴지 고민하곤 했다. 장님은 음흉하고 계산적이며 복수심에 차있는 결코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어야 할 만큼 악인 또한 아니다.

 

쉽게 규정할 수 없는 혼돈의 성격들은 영화의 모든 캐릭터에 스며있는 특징이다.

페드로의 엄마는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의 상징이다. 그녀는 페드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이미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잊은지 오래되었다고 일갈한다. 물건을 훔쳤다고 의심받는 페드로를 직접 경찰서에 데려가면서도 그녀는 아이에게 어떤 안타까움, 슬픔도 느끼지 못한다. 페드로는 길거리에서 방황하다 가끔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결코 아이에게 마음을 여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는 페드로 말고도 길러야 할 다른 자식들이 많다. 그녀는 남편도 없이 하루종일 일만 한다. 궤도를 이탈한 페드로에겐 비정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에겐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범죄를 부추기는 우두머리이자 우상인 소년 자이로는, 영화 상 사건의 모든 원흉이고 모든 악행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 중 가장 능청스럽고, 제일 눈에 띄게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 뼘은 큰 키에 늘씬함, 그리고 제일 배우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교도소 경험에 대해 허세를 늘어놓고, 페드로 엄마를 유혹 할때는 착한 아이인 듯 고아로써의 외로움을 토로하며 모성애를 자극시킨다. 자이로는 나중에 응징되지만, 그게 썩 시원한 정의구현처럼 보이지도 않고, 어떤 카타르시스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모호한 영화의 흐름, 전반적으로 모두에게 깔려있는 비극적인 초상이 있다.

 

일부를 따라가보면,

자이로는 두가지의 살인을 저지른 후, 그를 잡으러 온 경찰의 총에 죽게 된다. 그가 경찰에 포위를 받게 되는 결정적 이유는 앞선 늙은 장님의 제보 때문이다. 자이로 패거리들은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장님의 돈을 빼앗고 폭력을 휘두른 전력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님이 직접 자이로를 고발하고 경찰들과 매복해서 그의 죽음을 만족스러워 한 근본적 계기는, 부랑 아이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으로 보인다. 같이 지내던 수족 남자아이가 자신의 집에 부랑아 친구(페드로)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반발심에 배신감을 느끼고 그들을 다 내쫒으며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 바로 전에, 그 노인는 염소 젖을 배달하기 위해 찾아온 여자아이를 은밀하게 희롱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차후 페드로가 자신의 집 헛간에 죽어있는 걸 발견하는 인물이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사건에 연류되지 않기 위해 시체를 언덕에 유기하는 전개로 흘러간다.

결코 선함을 고결하게만 두지 않는 관점, 악행이 굴레처럼 계속 서로에게 이어지는 이 판에서는 모두가 그저 서글플 뿐이다.


사악하고 가학적이며 잔인하고 믿음성이 없는 악한 자이보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결코 사랑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일종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자이보를 바라보는 관점" , 앙드레 바쟁

 

이 불분명한 삶의 태도들, 가치가 혼란스러운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인 페드로는 결국 그들의 지주라 할만한 자이보와 다투며 죽고 만다. 페드로의 시체는 집이 없는 아이들이 숨어 살던 헛간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죽은 페드로를 발견한 그 집 사람들은 늦은 밤, 몰래 수레에 실어 시체를 멀리 떨어진 언덕에 쓰레기와 함께 던져 버린다. 그게 페드로인지 알면서도, 그 아이에게 큰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이 의문의 사건에 연류되면 본인들에게 해가 갈테고 그 공권력에 자신들이 대응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집의 가족들은 페드로의 시체가 담긴 수레를 끌고 집을 나서면서 페드로의 어머니와 마주친다. 페드로의 어머니는 뒤늦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페드로의 행방을 찾던 중이었다. 그러나 모두 페드로에 대해서 침묵할 뿐이다.

 

아는 아이의 시체를 쓰레기 더미와 함께 유기하는 그 가족들에게도 양심과 동정심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영화상 그 가족들은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정심을 가득 담은 그 손으로,  부러 발견하라는 심정으로 시체를 언덕에 버렸을 것이다. 

도덕성과 인간성이 충분히 응당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건 근본적으로 환경이 그리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가역한 세계 안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절대적 기준을 잃어가는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지금도 대부분은 그렇게, 절충적인 의지 정도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바쟁은 이 세계를 '모두는, 행복이 아니라 더 불행해지지 않으려는 목표로 아둥바둥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가난하고 모두가 뭐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싸우는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근본적으로 ‘가난해지지 않는다'. 선악을 초월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행복이나 동정 같은것도 초월해 버렸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도덕심은 그들의 운명을 표현해 주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순결이나 고결함에 대한 취향 말이다. 특권층에 있는 등장인물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악하다’고 비난하는 일은 없다. 기껏해야 그들은 그 사악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애쓸 뿐이다. 이들은 삶 외에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도덕성과 사회 질서에 의해 길들여진 삶. 그러나 빈곤이라는 무질서에 의해 봉쇄된 지상 낙원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 삶 말이다. 진정 중요한 문제는 행복이 존재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불행해 질 수 있는지를 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빈곤에 의한 가치 파괴" , 앙드레 바쟁

[먹고 먹히고 먹고 먹히고...뱀의 머리가 꼬리를 무는 이 구조에 아이들이라고 열외는 없다] 

 

데이비드 린의 <올리버트위스트>에서 올리버는 베일에 쌓여있던 친척과 재회하며 그 지옥같은 곳에서 구원 받을 자격을 얻는다. 그 아이는 사실 그런 진흙탕 속에서 고통받을 이유가 없는 계급이었다. 

<잊혀진 사람들>에도 비슷한 구원의 공간과 인물이 있다. 그건 그나마 작동되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이 못된 제 아들을 가둬주세요. 어떻게 다뤄도 저는 상관 없습니다.

자신에게 완전히 손을 놓은 엄마에게 이끌려 경찰서로 끌려간 페드로는 결국 교화를 목적으로 국가에서 운영되는 농장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가난과 불신이 아이들의 일탈을 일으킨다고 굳게 믿는 교장을 만나게 된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페드로에게는 큰 돈을 쥐어주고 혼자 밖으로 내보내 신뢰를 실험한다. 학교 밖 가게에 가서 담배를 사오면 되는 일이었다. 

실제 페드로는 그 믿음에 부합하고 싶어한다. 애초 그는 각박한 삶에서 언제나 제대로 살 구멍을 찾기위해 이리저리 해보던 아이였다. 그러나 그가 학교 밖을 나서고 처음 만나는 건 다름아닌 패거리 자이보였다. 자이보는 교장의 돈을 모두 뻬앗고, 페드로에게 빨리 그들의 세계로 복귀하라 종용하며 사라진다. 

 

결국 페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신뢰와 구원의 세계에 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돈을 뺏기며 이미 신뢰를 저버렸고, 결국 자이보가 있는 한 자신은 구원될 수 없다고 믿게 되기 떄문이다. 마침 페드로는 자이보가 떨어뜨리고 간 칼을 발견한다. 페드로가 일하던 가게에 찾아온 자이보가 몰래 훔쳐간 그 칼. 페드로가 도둑으로 몰려 결국 갱생시설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그 칼! 페드로는 그 칼로 자이보를 죽이고자 마음 먹고 그를 찾아간다. 이 세계는 결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는 구조적인 굴레 안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게 설계된 곳이다.

 


이는 (갱생) 신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만일 페드로가 감독관의 신뢰를 배반했다면 오히려 자이보는 그러지 말라고 선행을 권유했을 것이다. 이 실험은 페드로의 의지와는 달리 외부의 영향으로 실패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사회가 이중의 책임을 떠안게 되기 떄문이다페드로를 비행으로 이끈 책임과 그가 구원받을 기회를 박탈한 책임이다정의와 노동 그리고 형제애를 바탕으로 꾸려나가는 시범 농장(정부정책)은 좋은 일이다그러나 사회가 여전히 부정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한 (세계의 객관적인 잔혹함또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사회 시스템의 실패" , 앙드레 바쟁

[자이보가 정말 지치지도 않고 부지런하게 악행을 퍼뜨리고 다니는 통에 한번 엮이면 헤어나올 길이 없다]

 

이 영화는 40년대 제작된 여타 영화들이 그러하 듯, 지금 보기엔 꽤 낡고 답답한 구석이 있다.

치열하고, 비정한 멕시코의 뒷골목을 다루고 있지만, 그 세계는 현대영화들처럼 실감나는 공간은 아니다. 그들의 싸움과 죽음 또한 양식적이고, 어떤 장면들은 정황만 존재하는 시늉으로 보인다 . 큰 자본이 투입되었을것 같은 '올리버 트위스트'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자꾸 두 영화의 비교가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장면 한장면 회화 같은 프레임으로 여전히 시각적 매력이 살아 있는 ‘올리버트위스트’에 비해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지금 시점에선) 좀 따분한 감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매력이 드러나는 부분은 잘 짜여진 미장센의 영역이 아니다. 특별하게도 영화엔 낡고 양식적인 구식의 틀을 깨고 섬뜻하게 다가오는 이질적인 장면들이 섞여있다. 그건 프레임에서 두드러지는게 아니라 흐름에서 드러나는, 결이 다른 구성이 불현듯 치고나오는 이질감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마을을 떠도는 페드로의 모습 이후, 다큐멘터리 풍의 대도시 풍경들이 펼쳐지고, 영화에선 처음 등장하는 도시 거리에서 중년 남성이 페드로를 돈으로 사려하고 페드로가 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살인의 목격자인 페드로를 감시하려 자꾸 페드로의 집을 염탐하는 자이로는 갑자기 페드로의 엄마와 흐름과 상관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성관계를 암시하는 전개가 펼쳐진다. 내게 이 장면들은 우화적인 이야기 속을 헤매다가 갑자기 이면의, 그리고 기이한 현실의 단면들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강렬하고 이질적으로 다가왔던 장면들은 두 주인공을 위해 하나씩 할당된 꿈시퀸스들이었다. 자이보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가며 느끼는 자기인식에서, 페드로가 몰래 집으로 돌아와 자기 침대에서 잠든 후 펼쳐지는 상황에서 이 영화만의 진가가 있다. 꿈으로 상징되는 이 장면들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 속 꿈묘사의 전형이다.

 

[꿈은 영화가 가장 시적인 순간]

 

영화에서 꿈이란 시적 언어로 설계된다.

혼란스러움, 긴장. 상징, 부유감, 이질적인 리듬, 인물들의 이상한 등장 방법, 독백 등. 꿈이란 대상에게 가장 안락한 어떤 것과 가장 불편한 어떤 것이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는 세계이다. 어떤 욕망이 이뤄지는 동시에 곧장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공포가 전반에 드리워 있다. 꿈장면을 잘 다루고 자주 이용하는 영화 감독들은 (이를테면 내겐 베르히만이나 로만 폴란스키,펠리니 같은 사람들의 꿈장면이 좋다)은 꿈을 단순히 착시를 일으키는 현실 -욕망을 대리 구현해주거나 현실의 다른 선택지의 예지몽이 되는- 로 단순화시키는 법이 없다. 그들에게 꿈은 현실이 알수없는 상태로 무너지는 징조이며, 꽁꽁 가리고 있던 인물들의 정서가 가장 폭발하는 순간, 클라이막스가 된다. 

 

꿈에서 페드로는 엄마에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위로를 듣는다. 따스한 포옹도 있다. 그러나 그 곳은 페드로가 돌아가고 싶던 그 집과는 좀 다른 공간이다. 가출했을때 머물던 헛간의 흔적이 방안에 기이하게 남아있고, 침대 밑에는 피를 흘리며 발작하는 자이로가 숨어 있다. 페드로의 엄마는 페드로가 그토록 원했던 고기를 기꺼이 꺼내 주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눈앞에서 흔들고 있을 뿐이다.

 

[페드로의 꿈. 꿈은 자기의 세계와 대면이다]

 

마지막 자이로가 죽어가면서 내면으로 침전하는 장면은 더욱 시적인 느낌이 있다. 

바닥에 쓰러진 자이로의 얼굴 위로 떠돌이 개가 중첩된다. 자이로는 죽어가는 순간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개를 본다. 그것은 투영된 자신일 것이다. 개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전진하는 시점이 있다. 모든 것들은 스스로에게 말하는 독백과 함께 흘러간다.


꼼짝 못하게 되었구나. 자이보.

머리에 정통으로!

조심해, 사나운 개가 있어.

봐라, 녀석이 오고 있다.

끝이야. 난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고 있어.

난 혼자야. 혼자, 언제나처럼.

더 이상 생각하지마. 그만 생각해.

잠을 자는거야. 그냥 자라구.

 

[자이보의 각성. 그에겐 자기 타자화의 냄새가 있다]

 

바쟁은 프로이트 이론이 헐리우드 영화에 사용되던 유행을 -이를테면 인물의 꿈을 해석해서 삶의 해답을 구하는 식의- 경멸했던 것 같다. 그가 히치콕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히치콕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좀 단순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책에서 그는 브뉴엘의 꿈장면이 무의식은 무의식대로 두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한다.

 


부뉴엘은 할리우드 프로이트식 초현실주의라는 최악의 전통 속에서 두가지 꿈을 재창조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부늬엘은 프로이트주의가 현대적 미학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를 너무나 의식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잊혀진 사람들>만이 부정할 수 없는 심오한 진실 속에서 정신분석적 상황을 제공해준다부뉘엘이 꿈에 어떤 구체적 형상을 제공했든(이 점이 가장 큰 문제다) 그가 만드는 꿈의 이미지는 가슴 떨리는 격렬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감동시킨다. 무의식 짙은 피가 이미지의 내부에 흐르며 관객을 압도하는 것이다.

"꿈의 미학" , 앙드레 바쟁

양식적인 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날것의 느낌, 지극히 현실적인 흐름에 살짝 스며드는 초현실성, 잔인하지만 선한 인상이 있는 이면적 사람들, 딱 떨어지는 목표와 주제는 아니지만 명확한 의도, 냉정하지만 비정하지는 않는 정서. 이 영화를 정의한다면 이 세계는 현실 객관적이고 균형적이라기보다는, 다층적이고 양면적인 곳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특성이 이 영화를 좀 더 현대적인 작가주의 영화로 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앙드레바쟁은 이 영화의 내면적 주제에 대해 “사랑에 관한 영화이며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관한 영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영화를 설명하는 많은 소개글에 지금도 흔하게 인용되고 있다. 내게 이 결론은 흥미로우면서 선뜻 다가오진 않는다.

 


라스 후르데스에 관한 기록영화는 일종의 냉소주의와 객관성 확보라는 자기만족의 냄새를 풍긴다. 동정의 거부는 심미적 자극의 색체를 띈다. 반대로 <잊혀진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 영화이며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관한 영화이다. 일종의 파스칼적 변증론에 의해 과감한 현실 해부를 통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면을 재발견하고, 우리를 사랑과 존경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잊혀진 사람들>에서 느껴지는 주된 감정은 인류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이다. 잔혹성 속에 담긴 아름다움. 그리고 타락 속에서도 끝없이 반복되어 보여지는 인간의 존엄성이 변증법적으로 잔인함을 자비와 사랑의 행위로 변화시킨다. <잊혀진 사람들>이 관객들에게 가학적 만족감이나 위선적 의분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잊혀진 사람들>의 내제적 주제" , 앙드레 바쟁

 

이 영화의 잔혹성이 변증법적으로 존엄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겐 다른 단서들이 더 필요했다. 아마 그건 브뉴엘 영화 세계 전반에 펼쳐있는 일관된 주제의식이나 삶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어떤 정서들과 더 밀접한 연결성이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인물들 모두가 안고 있는 위악성, 탈출구가 없는 시스템적 굴레, 결국 모두가 비극으로 치닫는 결론에서 어떻게 '자비와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는 존엄성'을 느낄수 있는걸까?

다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단서들은 있다. 

 

영화를 두번째 볼때, 비극에 묻혀 잊고 있던 예쁜 장면 하나가 눈에 띄였다. 가혹한 세계에서 헤매는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목걸이였다. 이건 충치가 없는 깨끗한 치아(아마 거리에서 죽은 사람) 하나를 엮은 목걸이였는데, 행운을 전해주는 것이라 설명한다. 아버지를 기다리던(사실 버려진) 남자 아이는 그 목걸이를 임시 거처하고 있던 헛간의 집주인 딸에게 걸어준다. 여자아이는 이 아이를 가엾이 여기고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후 이 남자아이가 진짜 혼자가 될 시점이 되자, 여자 아이는 그 목걸이를 다시 돌려주며 여정에 행운을 빌어준다. 그게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된다. 비정하게 영화는 그 아이가 거리를 홀로 방황하는 채로 끝나지만, 적어도 아이는 행운을 목에 걸고 그 거리를 헤맬 것이다.

 

페드로의 엄마는 페드로를 경찰서로 직접 보내고, 울부짓는 아이에게 냉정한 모습을 잠시 내려두고 '너를 믿는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기만같았다. 아이를 구치장에 보내고 그녀는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 따윈 없다고 했다가 경찰관에게 훈계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페드로의 시체를 버리러 가는 그 집에 페드로의 엄마가 불현듯 찾아온다. 물론 이미 그 아들은 죽었고, 아무도 그 아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녀가 뒤늦게라도 아이를 걱정하며 마을을 떠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영화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 안에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풀버젼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데, 2021년 지금 시점에도 수많은 댓글들이 새롭게 달리고 있다. 댓글을 번역기로 돌려보면, 특히 많은 남미 사람들이 이 영화를 특별한 자부심으로 여기는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시선이 현재 그들의 삶에도 크게 다를 것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는 글들이 많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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