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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영화] 몬스터 콜 A MONSTER CALLS(2016)

by 그리고아무말없었다 2017. 2. 26.

 

Un monstruo viene a verme, A Monster Calls, [몬스터 콜, 괴물의 부름]

 

  • 장   르 : 판타지 드라마
  • 국   가 : 미국, 스페인
  • 제작비 : 43,000,000$
  • 감   독 :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 배   우 : 루이스 맥더겔(코너 역), 시고니 위버(할머니 역), 펠리시티 존스(엄마 역), 리암니슨(주목나무 괴물 역) 등
  • 링   크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4786

 

 

 

죽을병에 걸린 엄마를 돌보며 사는 13살 소년 코너에게 어느 날부터 언덕 위에 있는 주목나무가 다가와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나무가 몬스터다. 나무는 총 세가지 이야기를 들려줄터니, 마지막엔 코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놔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야기들은 언덕에서 몇 백년을 살아간 주목나무가 겪은 민담, 동화같은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코너가 겪는 외적 내적 문제들에 대한 은유이자 길라잡이다. 살아 움직이는 주목나무를 대하며 아이는 이 몬스터가 엄마의 병을 고쳐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나 주목나무의 존재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코너를 위한 것들이었다. 엄마를 보내고, 모든 어그러진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필요한 열린 마음. 그것이 코너가 해야 할 마지막 이야기였다.

 

[한푼줍쇼. 아니, 어서 힘들다고 말해줍쇼]

 

 

성장담은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며 한뼘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쓴맛은 흔히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과 연결된다. 아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을 받아들이며 정서적으로 성숙하는 과정.

이 영화도 그 전형이다. 누군가를 상실하면 상처가 아렸다가 아물며 아련해지고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는 진리.

한발 더 나가는 이야기도 있다. 병든 엄마는 정말 아이의 삶에 치명적이었다는 것, 사실 마음 한켠에서 하루빨리 발목잡는 엄마를 떠나 지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는 것, 그리고 그 조차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 둥지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요지.

 

그런데 성실하게 이야기만 풀어놔도 중간은 할 것 같은 소재들이 영화 속에선 영 시원찮았다. 뭔가 결여되어 있고 모든게 겉돌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영화는 영국에서 출판된 청소년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소설은 수상경력이 많았고, 나름 유명세가 있는 듯 보였다. 분명 영화의 구멍들이 근사하게 매꿔져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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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아주 특색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섬세한 개성이 있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죽기만큼 싫은 외할머니 집에 머물러야 하는 코너가 그 집에 들어서며 느끼는 감정들이 이렇게 기술된다.

 

코너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 손님방으로 갔다. 외할머니는 계속 손님방을 코너 방이라고 불렀지만 코너는 고집스레 손님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늘 고개를 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달리 뭐라 부르겠는가? 전혀 자기 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자아이 방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 지내는 방같지도 않았다. 하얀 벽에는 아무것도 없고 돛단배 그림 액자만 세 개 걸려 있었다. 외할머니가 그런 걸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집에나 어느 행성에나 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방이었다. 아무것도 코너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주인공 코너가 혐오하는 외할머니가 있다.  외할머니는 또래 아이들의 할머니들과 달랐다. 자기 사무실을 가지고 여전히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매사 철두철미 했고 권위적이기도 했다. 그녀는 코너에게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말썽 부리지 마라."
 "내 나이의 여자가 혼자 살면서 스스로 매사에 철저하지 않으면 누가 해 주겠니?

 

코너에게 외할머니는 맞서야 할 대상이다. 외할머니는 엄마를 병원에 보내 집중 치료를 받게하고, 코너는 멀리 떨어진 외할머니집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여긴다. 할머니의 말투는 언제나 타협이 없고 냉정하며 무자비하다.  코너는 그런 식의 삶의 변화를 원치 않는다.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사실 그것은 곧 엄마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순차적으로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한없이 어렵고, 사실 외할머니도 아직 코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치 않기 떄문에 이들이 함께하는 삶은 지옥같다.

냉혹한 상황을 가장 현실적으로 일깨우는 외할머니의 존재는 막 드러나진 않아도 꽤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판타지에 균형을 잡아 주기 떄문이다. 그런데 영화 속 시고니 위버가 연기하는 외할머니는 코너의 외할머니가 아니라 그냥 시고니 위버같다. 전형적이고 딱딱한 여군식 태도, 아이가 싫어할 할머니인건 분명한데 뜻밖의 다른 이면들은 별로 다가오지 않는 평면적이고 무미건조한 해석. 그러니까 둘의 관계는 감정으로 전달받는게 아니라 맥락으로 유추해야 한다. 

 

[내가 바로 차도녀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소설은 여러모로 어려운 길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물들도 그렇다. 누구하나 그냥 상황으로 해결되는, 굳이 설명할 필요없는 단순한 사람들이 없다. 주목나무가 처음 코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상엔 완벽한 악인도, 완벽한 선인도 없고 모두 그 중간 어디쯤 위치해 있다는 이야기였다. 두번째 이야기는 방향없고 완벽하지 않는 믿음은 결국 단죄받는다는 것이다. 쌀쌀맞고 코너를 보듬어주지 않는 외할머니는 코너에게 엄마의 죽음을 빨리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인물이다. 반면 엄마는 코너에게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할수가 없다. 그 순간 그건 현실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살수 있다고 믿는다. 선의를 가진 악행과 악의로 보이는 선행 사이에서 코너의 세상은 되돌릴 수 없이 엉망이 된다. 어떤 태도를 취하고 살아야 할지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코너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이미 코너의 엄마가 곧 죽을 거라는 소문이 퍼져있다. 코너와 가까운 여자아이가 코너를 걱정하는 마음에 코너의 집안 사정을 아이들에게 털어놓은게 화근이었다. 이후 코너를 대하는 모든 학교 사람들의 태도가 싹 바꿔어 버렸다. 코너는 자신을 바라보는 동정과 어려움들이 싫었다. 그래서 침묵하고 그들과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다.

그런 코너에게 유난히 관심을 가지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를 잘하지만 음흉하고 지능적이라 선생님들마저 경계하는 해리라는 남자아이였다. 그는 패거리를 데리고 다니며 코너를 괴롭혔다.

자칫 상처를 건들일까봐 섣불리 말을 붙이지 못하는 학우들, 삶의 기반이 무너진 코너가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며 코너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않는 선생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싫어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고 사는 코너. 그런 코너가 도대체 어떤 생각 속에 사는지 해리는 궁금하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교류되기엔 두 소년 모두 철벽남들이라는게 이들의 불행이었다. 그래서 해리의 관심은 코너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표출되었다.

 

[우리 쉬운 방법으로 사랑할 순 없겠니?]

 

해리는 미묘하고, 이해하기 까다로운 캐릭터처럼 보인다. 소설이 해리를 충분히 조명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행동, 대사들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영리한 소년이 골몰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위악성들을 유치하게 보이지 않게 참 애쓴다는 느낌. 그러다 보니 모호해지고, 결국 결말없이 사라져버리지만 관계도를 망칠만큼 흐지부지한건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섬세한 감정을 전달하기에 여러모로 투박하다. 이게 꽤나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극 말미에서 해리가 주는 관심은 코너에게 마지막 보루처럼 그려지는데, 그런 해리의 행위들이 썩 코너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갈거라고 기대가 안되기 때문이다.

 

이야기 말미에 불행이 삶을 변화시키고 초라한 상황이 벅차서 그걸 극복하기 거부한 아이가 상황을 깨기 위해 몸부림 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시도때도 없이 코너를 괴롭히던 해리가 어느 날 갑자기 코너에게 관심을 거두기로 하는 장면이다.

 

"코너 오말리. 엄마 때문에 모두 불쌍하게 생각하는 아이. 자기가 다른 존재나 되는 것처럼, 자기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고한 척 다니는 아이."

"널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너에게 할 수 있는 내 최후의 일격은 무관심이야. 안녕. 코너"

 

그리고 해리는 악수를 청하며 떠난다. 이젠 학교 어느누구도 정말 코너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두 불편해 하며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지나친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추고 고목나무가 등장해서 세번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보이지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다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나? 그러다가 어느 날 보이지 않는 사람은 결심했다. 저들이 나를 보게 만들 것이다.....

이제는 보이겠지. 이제는 보일거야. 이제는 보이겠지.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다."

 

 

고목나무가 사라지고 시간이 다시 돌때,  코너는 초인적인 힘으로 해리를 묵사발로 만들어 놓은 뒤였다.

 

[에바1호기 폭주]

 

 

모두가 코너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이 아이들은 그러는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걸까?

...

"교칙에 따르면 즉각 퇴학이다"

그때 코너는 몸이 축 처지는 느낌은 사실 자기를 짓누르던 무게가 덜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을 받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게 제대로 되었다.

....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네가 겪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벌을 안주실거에요?"

교장 선생님이 어두운 얼굴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정하게 여길 지경이었다. 그러더니 아빠가 한 말하고 아주 비슷한 말을 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

코너는 더 이상 안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 코너를 의식했다. 그렇지만 코너는 전보다 더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악수를 청하고 나의 무관심이 너에겐 징벌일지니.라며 돌아서는 해리의 행동은 필요 이상으로 낭만적이긴 하다. 미묘한 줄타기를 하던 그 소년들의 정서에서 맥이 좀 풀린다. 그런 해리에게 폭발하는 코너의 태도도 과하게 문학적인 면이 있다. 대놓고 상징적이라고 할까. 그런데 어느방면으로든 감정적으로 쌓아올린게 충분치 않는 영화에서 해리의 태도는 그냥 뜬금없다. 의미 전달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종이인형 같아 그 앙상함이 당혹스럽다.

 

 

사실 애초 이 소설은 시각화되기엔 다양한 부담들을 안고 있다고 느낀다. 캐릭터들은 모두 구구절절한 설명과 상황들이 많이 필요한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아이 내면을 표현하는 소설 속 장치들 -이를테면 커다란 나무 괴물의 이야기나 초현실적인 상황들, 코너가 꿈꾸는 세상의 종말 같은 묘사들- 은 활자에선 내, 외면의 구분 필요없이 함께 팔닥거리겠지만, 그 상징들이 시각적으로 채워지는 영화에선 본 이야기를 희석시킬 정도로 과하게 느껴진다. 아이의 질풍노도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영화는 두시간동안 이 모든걸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그리고 있다. 이 시각적 메타포들은 은유적이지만 이야기에 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서가 확 전달되는 그림들도 아니다. 결국 눈은 즐겁지만 주객전도 되기 딱 좋은 것들이지 않나?

 

 

[내 마음은 블록버스터 황무지]

 

 

어려운 길을 걷는 이 이야기가 결말에 도착해서는 정말 난해한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아이가 엄마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며, 또 그게 어떤 의미인지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목나무가 소설과 영화의 시작부터 선언한 일이다. "코너 너의 입으로, 삶의 불행 앞에서 니가 뭘 깨닫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야!" 그러나 이게 단정적으로 표현 하기 쉬운 일일까? 물론 소설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조금 비켜가는 자세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차피 그건 단정하기엔 무례한 것들이다. 코너가 스스로 말해야 한다는 진실, 네번째 이야기는 무엇인가?

 

 

몬스터가 말했다.

" 너는 엄마를 떠나길 바랐고 동시에 엄마를 간절히 구하고 싶었다. 너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면서도 마음을 달래 주는 거짓말을 믿은 것이다. 그리고 네 마음은 두 가지를 다 믿은 것에 대해 너를 벌주는 것이다.

 ...그러나 나쁜것이 아니다. 생각일 뿐이다. 무수한 생각 중 하나. 행동이 아니었다.

 ....마음속의 다른 생각들을 어떻게 물리치냐고? 진실을 말해서. 지금 네가 한 것처럼. 진실을 말하라. 그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삶은 말로 쓰는 게 아니다. 삶은 행동으로 쓰는 거다. 네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네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 코너는 나무에게 말한다. 이런 상황이 그저 끝나기를 바랐고, 견딜수 없어서 엄마가 죽기를 원했고, 또 마음에서 놓은지 오래라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엄마와 함께 행복했던 이전의 삶을 열열히 원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자기가 진짜 뭘 원하는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나의 행위로 충분히 변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인생의 큰 불행은 대체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이후에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영향만 끼칠 수 있다. 결코 맞설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그게 근본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다고 좌절하지 말고. 무너지지 말고.

즉 코너 스스로가 말해야 했던 네 번째 이야기는 내용이 뭐가 되든 얘기를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요지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얘기다. 엄마가 결국 죽더라도. 차라리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소리질러! 엄마의 죽음앞에서도 막상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몰라 그게 두려워지는 네 꼴을 봐! 너의 고통을 이야기 해! 특별취급이 싫어서 꿍하다가 더 엉망진창이 된 외톨이 생활을 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돼. 일단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 그게 무엇이든 간에 너의 전부는 아니니까. 그럼 분명 더 나아질꺼야. 그게 바로 극복하는 거야. 완전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것조차 인정해야 해.

맥락은 이럴진데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이상한 곳에 은근히 방점이 찍혀 있긴 하다. 엄마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코너의 생각이 대단한 진실처럼 다뤄지는 면이 있다. 그런데 이건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게 울림이 되거나 극적인 요소도 물론 아니고. 방점을 분명히 찍어야 한다면 그런 생각 자체가 아니라 불필요한 죄책감에 무너지지 말라는 데 둬야 할 것이다.

 

엄마는 결국 죽는다. 그리고 코너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 엄마의 죽음을 겪으며 변화되는 둘의 관계는 영화가 끝나도 계속될 코너의 삶을 드러내는 일이니 신경이 쓰일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 외할머니는 코너를 위해 방을 특별하게 꾸며준다. 코너가 좋아하는 취미를 살려 화실처럼 꾸며진 방이다. 그게 외할머가 보내는 마음이다. 코너는 그곳에서 엄마가 어릴때 그린 스케치북을 발견한다. 스케치북에는 자기를 도왔던 주목나무가 어린시절 엄마에게도 찾아왔던 정황을 발견한다.

 

[모두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어른이 되었단다. 인가?]

 

 

소설은 병실에서 엄마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엔딩이다. 그래서 그 전에 병원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외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 대화가 이들의 관계를 말하는 전부다. 

 

 

"코너 그거 아니? 너랑 나 말이야. 잘 맞는 사람들은 아니지? 안 그러니?"

외할머니가 말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코너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할 거다. 알지?

 ... 하지만 그거 아니? 우리한테 공통점이 있다는 거."

"그래요?"

"네 엄마. 그게 우리 공통점이다."

외할머니에게나 코너에게나 엄마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건 정말 중대한 공통점이었다. 바로 그게 출발점이었다.

 

 

영화는 소설이 표현한 모든 과정을 품고 나아가, 둘의 관계를 마무리에 배치하며 더욱 진전된 상황을 묘사한다. 아마 영화 속 코너는 소설의 코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물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런 방도 얻었고, 외할머니는 코너를 헌신적으로 이해해보려 마음먹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너에게는 미안하지만 왠지 소설의 선택이 내게는 더 위로와 위안을 주었다. 비록 한뼘 더 성장했을지는 모르지만 어떤 전리품도 없이 엄마의 죽음에서 툭 내버려둔 이야기. 코너와 외할머니는 서로 다른 유형이라는걸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더이상 진전된 것이 있는지는 알수 없는 그런 상태. 그게 더 내 경험과 가까워서 '그래. 삶은 누구나 그런거지' 싶은 거.(로저 에버트 패러디)

 

 

[넌 더 불행한 모습이 어울려. 너에게 그림같은 방은 사치야. 코너]

 

 


PS. 영화는 여러모로 미지근하고 덜 성숙되었지만 소설에 비해 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영화를 보고 나는 감독이 분명 미술을 전공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코너가 미술을 좋아하고 그림에 상당히 소질이 있다는 건 소설에는 없는 설정인데, 그런 요소까지 넣어서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화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건조하고 혼란스러운 소설의 삽화와 달리 영화 속 주목나무의 이야기 장면들은 색채찬란한 예술의 장이다. 전체적으로 그런 집착이 좀 영화에겐 해가 된 것 같지만. 

 

 

 

[영화 속 애니메이션 장면의 콘티. 콘티도 아릅답네.]